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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대중가수 나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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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나사모
작성일17-07-27 10:42 조회5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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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태백산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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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대중가수” 시리즈는 현재 제 블로그인 “JOHN CENA의 WWE 프로레슬링”에서     
     연재를 진행하고 있으며 각 커뮤니티와 메타 블로그 연재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습니다.

@ 나훈아 ----> (레전드)
  => 1970년대 가요계는 한국 대중가요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라이벌, “남진 vs 나훈아”의 라이벌 시대였습니다. 나훈아는 1970년대 가요계의 톱스타로서 조용필(80년대)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가요계의 황제로 군림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나훈아는 1966년 “천리길”을 발표하며 가수로 데뷔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데뷔했던 남진과 나훈아는 1960년대 후반부터 톱스타의 반열로 올라서기 시작해서 1970년대에 들어서는 절정의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습니다. 1970년대 초반까지는 남진이 “MBC 10대가수 가요제”의 “최고 인기가수”를 3년 연속으로 수상하면서 앞서나가고 있었습니다. 나훈아는 당대 최고의 톱스타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MBC 10대가수 가요제”에서 “가수왕(최고 인기가수)”과 인연을 맺지 못한 이유 때문에 “무관의 제왕”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나훈아가 라이벌 경쟁에서 앞서나가기 시작하면서 한국 대중가요계의 톱스타로 떠올랐습니다. 나훈아는 수십년간 가수로 활동하면서 통산 2000곡 이상의 노래를 취입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800곡 이상이 자작곡이었습니다. 이는 나훈아 이후에 등장한 “가왕” 조용필과 비교해서도 손색이 없는 기록입니다. 오늘날과는 달리, 당시에는 매니아층이나 평론가 집단이 부각되거나 “뮤지션”이라는 개념을 강조하던 시기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훈아는 인기뿐만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출중한 능력을 보여줬습니다.

  사실 대중가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한시대를 풍미하면서 대중의 정서를 반영하고 대중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이후로 음악을 향유하는 계층에서 “매니아”와 “평론가” 집단이 부각됨과 동시에 “뮤지션”이라는 개념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과거의 대중가요 역사를 이끌었던 수많은 국민가수들이 다소 부당한 폄하를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나마 최근의 신세대에게도 널리 알려진 조용필만이 이러한 부당한 폄하에서 예외에 해당되고 있습니다. 나훈아가 활동하던 1970년대에는 “뮤지션”이라는 개념 자체가 그리 중요하게 여겨지던 시대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훈아는 “톱스타”로서뿐만 아니라 “뮤지션”으로도 전혀 나무랄 데 없는 능력을 보여줬습니다.

  나훈아는 역대 한국 대중가수 중에서 가장 많은 히트곡을 배출한 가수로서 유명하며 오늘날 일반 대중들이 즐겨 찾는 노래방에서도 나훈아의 노래는 가장 많이 불려지는 애창곡으로서 널리 사랑받고 있습니다. 한편 한국 대중음악 역사에서 음반시장은 거의 불모지나 다름없다가 1980년대를 거쳐서 1990년대 이후에 최대의 호황을 맞이했는데, 1970년대의 나훈아는 그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나훈아의 수많은 히트곡 중에서도 “물레방아 도는데”, “잡초”, “갈무리”, “무시로”, “고향역”, ”18세 순이“ 등의 노래들이 대표곡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한편 나훈아는 본의 아니게 뉴스의 중심인물이 되기도 했는데 1972년에는 공연중 피습사건이라는 불행한 사건을 겪었습니다. 1976년에는 당대 최고의 여배우였던 김지미 씨와의 결혼으로 세인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레전드(전설)”, “국민가수”, “트로트 황제”와 같은 수식어를 달고 다니던 나훈아는 2007년 후반부터 괴담에 시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와병설, 납치설, 중병설, 여배우와의 염문설” 등의 온갖 괴소문이 나돌았는데 나훈아는 2008년에 기자회견을 열고 직접 해명에 나섰습니다. 한국 최고의 톱가수인 나훈아의 기자회견은 당시 뉴스의 중심에 서며 세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나훈아의 “카리스마”는 다시한번 찬사를 받았습니다. 

  한국 대중가요 역사에서 “시대와 세대를 초월한 국민가수”는 “1940~50년대의 남인수, 백년설, 현인”, “1960년대의 이미자, 패티김”, “1970년대의 남진, 나훈아”, “1980년대의 조용필”이 대표적입니다. 일반적으로 각 시대별 대표주자를 “무조건 10년 단위로 끊어서 한 명씩만 나열”하라고 한다면 70년대의 대표주자로서는 나훈아가 좀더 많이 거론되는 편이지만 당대 최고의 톱스타였던 남진과 나훈아의 인기 경쟁은 사실상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만큼 치열했습니다.

  사실 어느 분야에서든지 10년 단위로 시대를 나눠서 “시대별 대표주자를 무조건 한 명씩만 나열”한다는 것은 여러 모로 불합리성을 내포하고 있지만 어쨌든, 구태여 한 명으로 압축한다고 할 때 70년대를 대표하는 인물로는 나훈아가 그 선두주자로 꼽히고 있습니다. 특히 과거 가요계의 역사를 잘 알지 못하는 최근의 젊은 세대의 대중에게 있어서도 “가왕 조용필”(1980년대)와 함께 “조용필 이전(1970년대)에는 나훈아”, “조용필 이후(1990년대)에는 서태지”의 이름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상 1980년대의 조용필 이후로는 한국 대중가요에서 “모든 세대의 대중에게 사랑받는 진정한 국민가수”의 맥은 사실상 끊긴 상태입니다. 조용필과 그 이전까지의 한국 대중가요계에는 세대간 단절 없이 남녀노소 모두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국민가수들이 존재했고, 그 중에서도 광복 이전과 이후를 통틀어서 남인수(1940~50년대), 이미자(1960년대), 나훈아(1970년대), 조용필(1980년대)의 존재는 더욱 각별하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한편 나훈아는 1998년에 조선일보에서 음악 평론가들에게 의뢰한 “건국 이후 가요 베스트 50” 설문조사에서도 조용필, 이미자에 이어서 3위를 마크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1970년대와 그 이전까지의 한국 대중가요계는 나훈아 이외에도 대부분의 가수들이 “트로트”라는 장르를 선호했지만 나훈아는 그 중에서도 “트로트 황제”라는 별명을 얻으면서 트로트라는 장르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 되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톱스타였던 나훈아와 함께, “남진 vs 나훈아 라이벌 시대”는 한시대를 풍미한 동시에 오늘날까지도 한국 대중가요 역사상 최고의 라이벌 시대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출처: 과거 신문기사와 TV 방송 등을 기본 토대로 해서, 인터넷 검색(네이버, 다음, 가수 홈페이지)을 통해서 얻은 정보들을 참고했습니다. 특히, 옛날 가요 부분은 네이버 지식인, 네이버 백과사전, 위키백과 등의 자료에 더욱 많은 부분을 의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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