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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리고 꺽는 창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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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나사모
작성일17-07-27 10:49 조회1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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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리고 꺾는 창법‘꺾이지않는황제’피습등 숱한 난관에도 45년 군림
 
 
 
 
 
1966년 서울 서라벌예고 2학년생이던 최홍기가 가수 나훈아로 다시 태어나는 데엔 그 자신의 말로 한 시간이면 충분했다. 까까머리 소년은 마장동 스튜디오에서 사실상의 데뷔곡이 된 ‘천리길’과 그의 출세작이 된 ‘사랑은 눈물의 씨앗’ 등 네 곡을 단숨에 녹음한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그 이후로 오십 년에 이르는 기나긴 시간 동안 불멸의 전당에 등재되었다.

나훈아가 발표한 노래는 2500곡이 넘으며 그중에서 자작곡은 800여 곡이고, ‘스매시 히트’를 기록한 노래도 50곡이 넘는다. 그와 함께 한국 현대사를 관통한 한반도의 사람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자연스럽게 그를 트로트의 황제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

1972년 공연장 무대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피습, 일곱 살 연상인 국민여배우 김지미와의 충격적인 결혼과 이혼이라는 스캔들, 80년대 이후 트로트 장르의 전반적인 몰락…. 크고 작은 수많은 난관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그 어느 것도 황제를 굴복시키지 못했다.

나훈아의 트로트 가창은 한국 트로트 역사에서 혁명적인 것이었다. 그는 일본 엔카가 가지고 있는 섬세하고 유약한 여성적인 발성의 틀에서 벗어나 강인한 남성성을 극적으로 구현하는 대륙적인 울림을 창조했다. 트로트 특유의 고역의 비브라토는 그 자신의 표현대로 다이내믹한 ‘뒤집음과 꺾음’으로 발화되었다. 그것은 단정하고 서정적인 호소력을 주력 무기로 삼아온 남성 트로트의 계보를 마초적인 흡인력으로 전복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다. 초기 히트곡 ‘가지 마오’(1971년)와 ‘녹슬은 기찻길’(1972년)의 클라이맥스를 끌어올리는 나훈아의 폭발적인 에너지는 솔이나 로큰롤이 분만하는 그것에 결코 밀리지 않을뿐더러 트로트 특유의 노랫말의 감정이입은 더욱 강화된다.

나훈아의 발성의 근원에는 일본 엔카의 고정된 틀을 벗어나 자유롭게 고저장단을 호흡하려는 본능을 지닌 한국 전통 민요의 감수성이 잠복해 있다. 그는 70년대에도 민요 앨범을 정력적으로 발표했으며 랩 음악이 난무하던 90년대에도 ‘어매’(1994년) ‘허야’(1999년) 같은 빼어난 민요적 정취의 창작곡을 발표하는 기염을 토한다.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격화되기 시작한 남진-나훈아의 세기의 라이벌전은 식민지 시대 남인수-백년설의 격돌 이후 가장 폭발적인 경쟁 구도였고, 이들의 스타덤을 더욱 가속적으로 추동했다. 정치계의 박정희-김대중 간 영호남 라이벌 구도를 상기시키는 이 숨 가쁜 경주가 펼쳐지는 동안 나훈아는 생애의 걸작이자 광복 후 한국 트로트의 금자탑이 되는 ‘물레방아 도는데’(정두수 작사·박춘석 작곡·1972년)로 남진의 ‘님과 함께’(고향 작사·남국인 작곡)에 대립각을 세웠다.
 
 
 
남진의 노래가 개발도상국가의 근대화를 향한 소망 속에 담긴 미래의 중산층의 꿈을 노래했다면 나훈아의 ‘물레방아 도는데’는 이농현상으로 도시로 몰려든 어린 노동자들의 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슬픔을 형상화하며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말하자면 남진의 노래에서 전원은 풍요로운 낙원이지만 나훈아의 노래에서 그것은 가난해서 떠나왔지만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고향인 것이다.

느닷없이 시작된 김지미와의 결혼생활로 인해 1975년부터 5년간 나훈아는 뮤지션으로서의 생활을 잠정적으로 중단했다. 많은 이는 나훈아와 트로트의 시대는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80년대와 함께 그는 본격적인 싱어송라이터로서 새로운 2막을 기술하기 시작한다.

나훈아의 80년대는 그 시대를 지배했던 조용필의 행보에 질적으로 결코 뒤지지 않는 것이었다. 컴백작 ‘울긴 왜 울어’를 시발로 그는 거의 매년 신작 앨범을 발표하는 왕성한 창작력을 과시한다. ‘대동강 편지’(1981년) ‘여자이니까’(1982년) ‘사랑’(1983년) ‘청춘을 돌려다오’(1984년) ‘땡벌’(1987년) ‘무시로’(1988년) ‘건배’(1989년) ‘영영’(1990년)으로 이어지는 무시무시한 히트 퍼레이드는 그의 첫 전성기에 결코 뒤지지 않는 것이었다.

이 노래의 대부분을 그가 작곡했고 특히 80년대 후반의 세 앨범이 한두 곡을 제외하면 모두 자작곡으로 채워졌다는 것, 그리고 발라드나 테크노는 물론이고 ‘술이 부르는 노래’(1999년)에서처럼 랩까지 포섭하는 놀라운 소화력을 보인 것은 그가 얼마나 치열한 진정성으로 도전 의지를 집중시켰는지를 여실히 알려 준다.

나훈아는 조용필과 또 다른 영토에서 성인 취향의 한국 대중음악이라는 반석을 굳게 세웠고, 나란히 최고의 콘서트 스타가 되었다. 어느 누구도 ‘황제’ 나훈아를 폐위시킬 수 없다. 그의 폐위는 오로지 그 자신만이 결정할 수 있을 뿐이다.
 
<자료 : 동아일보(강헌/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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