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매체자료

언론매체자료

오효진의 인간 탐험/5

페이지 정보

작성자 나사모
작성일17-07-27 10:58 조회141회 댓글0건

본문

글쓴이 : 나사모
<!--2013-04-15 --><!--//2013-04-15 --><!-- --><!-- 내용 출력 -->
40세에 道德經 읽고 크게 깨달아


어른 얘기는 좀더 계속된다.


『마흔 살이 됐을 때였지요. 그 전까지 저는 스스로 참 똑똑한 줄 알았어요. 마흔 살이 되면서 어떤 책을 보다가 그냥 뒤통수를 뚜디려 맞았어요』

―그게 무슨 책입니까?

그는 대답 대신 책상에 가서 「도덕경」을 가지고 왔다.


―어느 부분이 그렇게 충격적이던가요.



『전체가 그랬어요. 무슨 지침으로 삼기엔 좀 복잡했지만 내가 너무 몰랐다는 생각이 엄습해 왔어요. 그때부터 나는 사람들 뒤에 서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앞에 서지 않고 한 발짝만 뒤로 서자, 이런 생각을 했어요』

―언제부터 다시 노래를 시작했던가요?


『80년부터 노래를 시작했습니다. 金芝美씨와 73년부터 만나기 시작해서 81년에 헤어졌는데, 75년부터 노래를 안 부르다가 80년에 다시 시작한 거죠. 5년간 안 부른 셈이죠』

―참 어려웠겠네요.



『어려웠죠. 그러나 화려했죠. 내가 노래는 안 했지만 매일 주간지에 나서 나에 대한 관심은 많았기 때문에 내 노래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많았지요』

―그때 KBS에서 화려한 컴백 쇼를 했지요?


『그렇지요. 참 화려하게 했는데, 바로 방송출연 금지 처분을 받았어요』

―왜요?


『「울긴 왜 울어」를 불렀는데 저속하다고. 웃어도 시원찮은데 왜 우느냐, 이거죠. 그때가 80년대 초의 상황이니까. 다른 방송사에선 괜찮았는데 KBS만 방송금지 결정을 내렸어요. 그렇지만 이렇게 되니까 다른 방송사에서도 조심하게 돼서 제가 방송활동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죠』

―헤어질 때 돈이 한푼도 없이 나왔을 거 아닙니까?


『한푼이 아니라 숫가락 젓가락 하나도 없이 나왔습니다. 있는 돈 다 주고 나왔죠. 그러고도 더 주고 나왔어요. 그게 남자답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게 무슨 얘기죠?


『그때 서울 청량리 맘모스 카바레에서 한 달에 1억원씩 받기로 하고 한 달치를 먼저 받아서, 3분의 2는 金芝美씨한테 주고 3분의 1로는 전세로 압구정동 현대 아파트를 얻었습니다』

―방송은 못 하고 맘모스에서 노랠 하셨겠군요.



『그럼요. 거기서도 히트를 쳐서 맘모스가 돈을 무지하게 벌었습니다. 저녁마다 사람들이 몰려 왔으니까요. 거기서 하루 한 시간 이상 공연을 했습니다』

취입 2500, 작사·작곡 800, 히트 53曲

―헤어지고 나오니까 부모님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아버지는 내 꼴도 보기 싫어 하시고, 어머니는 왔다갔다 하시면서 밥도 해주고 하셨는데, 어머니는 가슴 아픈 자식한테 뭐라고 얘기하기 힘드니까 「밥이나 제대로 묵어야지, 이놈아!」 이러셨죠』

―再起하면서 새 곡을 만들어 히트했죠?


『일단 再데뷰하면서 내놓은 「울긴 왜 울어」가 히트를 했구요, 다음에 「사랑」, 「잡초」, 「18세 순이」, 「영영」, 「갈무리」, 「무시로」 이런 곡들이 연달아 히트했습니다』

―히트곡은 몇 곡이나 됩니까?


『제가 정확하게 따져 보니까 53곡입디다. 취입은 2500여 곡 했고, 작사·작곡한 것이 800여 곡 됩니다』

음반 낸 양을 앨범으로 따지면 200장이 넘고 판매량은 2000만 장이 넘는다고 한다.


―작곡이 참 어려울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요. 가사 만들기가 어려워요. 가사만 만들면 그 속에서 멜로디가 흘러나온다니까요. 그리고 본능적인 감각이 있어야 해요. 억지로 만들겠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연예인들 중에 사업하다 실패한 분들이 적지 않던데.



『연예인들이 사업하다 실패하는 첫 번째 이유은 귀가 엷다는 겁니다. 남이 무슨 얘기 하면 「와, 맞아!」 하고 금방 그쪽으로 쏠립니다. 두 번째는 公과 私를 못 가립니다. 자기 기분대로 어린애처럼 할려고 합니다. 셋째로 연예인들이 절제된 생활을 안 합니다. 그러니까 약속이 제대로 안됩니다. 우리 비즈니스 하는 사람들은 해뜨기 전에 생각해 놨다가 해뜨면 그대로 막 뛰어야 합니다. 뛰어야 할 시간에 자리에 누워 있으면 됩니까?』

그가 자신의 기획사 我羅企劃을 현재의 위치인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그의 건물에 세운 것은 86년이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레코드 제작 판매업을 시작한 것은 89년 봄부터였다. 我羅企劃이란 이름 역시 그가 작명한 것이었다. 첫 작품으로 내놓은 것이 「사나이 눈물」. 이후 그는 과거에 그가 불렀던 노래도 편곡해서 새로 만들었고, 다른 가수가 부른 흘러간 가요도 새로 취입해 내놓았다. 후배 가수 주현미와 함께 메들리 카세트 테이프를 내놓아서 메들리 시장을 석권하기도 했다.

그가 내놓는 음반마다 잘 팔려 나가 이젠 「아라기획」 하면 도매상들이 선호하는 회사가 됐다고 한다.


韓·美·日에 알찬 회사, 재산 數百億

―이 회사가 업계에서 어떤 위칩니가?


『우리 회사는 구멍가겝니다. 그래도 아주 단단한 회삽니다. 지난번 IMF 때도 우리는 아무 걱정이 없었어요. 회사가 일을 크게 벌여 놓고 있으면 위기가 왔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죠. 그래서 저는 처음부터 압축시켜 놨지요』

―직원은?


『다섯 명밖에 안 돼요. 우리가 하는 일을 다른 회사처럼 할려면 100여명 있어야 돼요. 우리가 레코드 회사를 제대로 할려면 CD와 카세트 테이프 만드는 공장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만 80∼90명이 있어야 합니다. 거기다 관리직 판매직 합치면 100여 명이 있어야지요. 그런데 우리는 음반 만드는 일을 오아시스 레코드, 아세아 레코드 이런 곳에 賃加工(임가공)으로 시키거든요.

제일 조심할 게 사람 쓰는 겁니다. 사람 많이 쓰는 건 비즈니스로는 제롭니다. 위기가 오면 큰일 납니다. 또 퍼뜩하면 「나훈아 회장 나와라!」 하고 난리를 직이면 얼마나 골치가 아픕니까.

임가공 맡기기 전에 우리가 기본적인 제작을 하는데, 이때엔 사람이 많이 필요 없거든요. 녹음실도 빌려서 하고요. 이렇게 제작한 걸 레코드 회사에 갖다 주면서 CD를 만들어 달라고 하죠. 그러면서 한 장에 얼마씩을 쳐서 주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예를 들면, 한 달에 1억원벌 것을 임가공 회사에 주는 것 때문에 7천만원밖에 못 벌어요. 그러나 3천만원을 쓰는 대가로 우리는 IMF도 걱정 없고, 「나훈아, 나와라」 하는 일도 없는 거죠』

―여기서는 羅勳兒 노래만 냅니까?


『그렇지요. 제 음반만 내는 데도, 저희는 큰 레코드 회사가 가지고 있는 시장보다 더 큰 시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국에 도매상 32군데를 가지고 있습니다. 큰 회사는 오히려 28군데밖에 안 돼요』

―羅勳兒씨의 수입 가운데, 노래 불러서 들어오는 돈 하고 레코드 사업해서 들어오는 돈 하고 비율이 어떻습니까?


『비슷할 겁니다』

―와아!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금 미국에도 사업체가 있지요?


『미국 하와이에 무역 회사가 하나 있습니다. 음악과 전연 관계가 없는 회삽니다』

―일본에는?


『일본에는 아라기획과 똑같은 「서울뮤직」이란 회사가 있습니다. 거기도 현지 직원이 네 명 있는데 제 노래를 일본어 음반으로 내서 유통하는 회삽니다』

羅勳兒는 일본에도 진출해서 크게 활약했다. 그가 일본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85년이었다. 그후 94년 그는 일본인이 작사·작곡한 엔카 음반 「忘却雨(망각우)」를 내면서 일본 가요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해, 일본 노래와 그의 국내 히트곡(번역곡) 음반을 여러 장 냈다.

―일본에서도 한국에서처럼 히트했습니까?


『히트 못 했습니다. 그래도 손해보는 건 아닙니다. 거기선 제가 방송도 안 하고 콘서트도 안 하니까 히트하기가 어렵죠』

그의 재산은 정확하게 얼마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커졌지만, 주위에선 어림잡아도 수백억원은 넘을 것이라고 한다.


羅勳兒의 담배 끊는 법

그는 金芝美씨와 헤어진 지 2년 후인 83년 후배가수 丁水卿씨(본명 정해인)와 결혼해서 다시 가정을 꾸렸다.


―부인은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집사람이) 원래 노래를 할려고 했어요. 일본에 15세 때 가서 아이돌 가수가 됐는데 1년쯤 하다가 한국에서 공연을 한번 하고 싶었나 봐요. 그래서 내가 잘 아는 사람이 일본에 있었는데, 그 사람이 나한테 도와달라고 부탁을 했죠. 그러다가 그렇게 됐죠. 그때, 내가 뭔가 빨리 정리하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지금 가정적으로 퍽 안정된 것 같습니다.



『그렇죠. 그런데 제가 아버지 노릇, 남편 노릇을 제대로 못 합니다. 그래도 큰놈이 「저는 이 세상에서 아빠를 가장 존경한다」고 합니다. 학교(하와이 소재)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에 대해서 써오라」는 숙제를 낸 모양입니다. 후에 학교에 한번 갔더니 선생님이 「얘 혼자만 아빠를 제일 존경한다고 써왔다」고 그래요. 그래서 한번 보고 싶었다는 겁니다』

―담배를 많이 피우셨다던데.



『하루에 네 갑이오. 그렇게 많이 피우던 담배를 안 피운 지 2년8개월째 됩니다. 사람들이 담배를 못 끊는 이유가, 최면에 걸려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담배가 아주 대단한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못 끊는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내년 1월1일부터 끊겠다」고 정하고, 「내가 담배 끊었으니, 나한테 담배 권하지 말라」고 선언을 하고 그러죠.

담배 끊을라면 담배를 아주 낮춰보고 비웃어야 됩니다. 담배를 가볍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부터 끊겠다고 정하지 않고, 어느 날 점심 때 점심 먹고 담배 한 대 피우고, 「자 이제부턴 담배 안 피워야지」 이러고 다신 안 피운 겁니다. 지금도 저는 「안 피운다」고 그러지 「끊었다」고 안 하지요. 누가 물으면 「앞으로 5년 뒤에 피울 거야」 그럽니다

담배를 끊으면 금단현상이 오지요? 그건 「이제 내가 담배를 끊었으니까 절대로 못 피운다」 할 때 오거든요. 그러나 저는 안 피우니까 또 피울 수 있죠. 그러니까 금단현상도 안 오죠. 이게 내 마인드 컨트롤이에요』

―어디서 들으니까 小食이 건강비결이라고 돼 있던데,


『저는 간이 남보다 훨씬 크고 위장이 남보다 작아요』

―아니, 간이 크다니!


『의사인 친구가 간을 보는 새 기계가 들어왔다고 한번 오라고 해서 가 봤죠. 제 간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다른 사람 간보다 배는 더 커요. 난 「간 크다」는 말만 들었지, 내 간이 그렇게 클 줄은 몰랐어요.

그 대신에 위가 작아요. 그래서 많이 먹고 싶어도 사실은 많이 못 먹어요. 小食을 하는 게 아니라』

―술은?


『요즘 좀 마십니다. 한 15년간 끊었다가 요즘 다시 마시기 시작했어요』

―대전에 (金芝美씨와) 있을 때 글씨 공부를 하셨다구요?


『사실은 그 전부터 배울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제가 氣가 짧아요. 그때까지 제가 책을 못 읽었어요. 갑갑해서 가만히 앉아서 책을 읽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한 게 글씨입니다. 먹을 갈라면 적어도 30분간은 가만히 앉아서 갈아야 합니다. 처음엔 이 먹을 가는 데 한 열댓 번은 일어났다 앉았다 했습니다』

―학원에 가서 배웠나요?


『선생님이 오셨습니다. 글씨도 쓰고 동양화도 좀 하고 그랬습니다』

―서양화는 어떻게 해서 하게 됐습니까?


『김수정(女)이란 서양화가가 있는데 그 집과 교유가 있어서 왔다갔다 했어요. 그 집에 가서 그 화가가 그리는 걸 보니까 한번 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지도를 좀 받아서 시작했지요』

―그것도 氣를 다스리기 위해서?


『그것도 그렇지만 우리는 혼자 노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고독을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리실 줄 모르지만 저는 돈을 받고 제 얼굴을 보여 줘야 합니다. 그래서 휘젓고다니는 것보다는 혼자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혼자 있을 때는 무료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연예인들 가운덴 그런 때 술을 마시고 마약을 하고, 그래서 短命하게 간 분들이 있잖습니까? 이런 것들이 다 내가 나를 이기지 못해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그의 건물 2층 사무실 입구에는 꼭 고흐의 자화상 같은, 초록 바탕에 그린 그의 자화상(유화)이 걸려 있다. 같은 사무실 벽면에는 「여인의 눈물」과 「성령의 이미지Ⅱ」란 제목이 붙은 30호쯤 되는 유화 두 점이 걸려 있었다. 두 점 다 그의 작품으로, 1999년과 2000년에 한국미술인 선교회의 공모전에서 입선한 것들이다. 수준급 이상으로 보였다.

―國展에 입선한 적도 있습니까.



『사실은 지금 출품할라고 서양화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서양화를 기리기(그리기) 시작한 지 6년이 됐습니다. 나 혼자 기리니까 잘 기리는 지 못 기리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재작년(99년)에 미술인 선교회에서 공모전을 하길래 살짝 「최홍기」라고 이름을 써서 두 점을 갖다 낸 겁니다. 심판을 받고 싶어서 보냈는데, 어, 생각지도 않게 입선을 한 겁니다. 그래서 작년에 또 냈더니 또 입선이 된 겁니다! 그래서 조금 힘이 나서 지금 國展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